사회·문화

우리나라의 도로명주소. 잘못된 프로젝트.

나의지식 2016. 2. 27. 08:28

길은 마치 흐르는 물과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하고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고 나눠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길을 이용하는 인간은 나무처럼 가만히 앉아있는 생물이 아니니깐. 이렇게 유동적인 길을 기준으로 잡아 건물의 위치를 표시한다는 생각은 확실히 어리석다. 도로명주소 말이다. 

도로명주소는 서양에서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만들어졌다. 우리나라가 쓰고 있던 번지주소가 만들어진 시점보다 훨씬 더 옛날이다. 루이 16세가 단두대에 처형되고 조지 워싱턴이 독립전쟁을 벌이던 시대다. 임진왜란이 16세기 말에 일어났다. 그때는 지금처럼 사람이 많지도 않았고 이동이 많지도 않았다. 그래서 길은 덜 유동적이었다. 한번 만들어진 길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람들은 그때보다 훨씬 많아졌고 교통수단의 발달로 사람들은 더 많이 움직이고 토목기술의 발달로 길은 더욱 변화무쌍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기하급수적이다. 도로명으로 건물의 위치를 표시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계속 도로명 주소를 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익숙하니깐. 거기다 젊은 사람들은 어차피 길찾는데 구글 지도 같은 걸로 찾으니깐 도로명을 쓰던 뭘 쓰던 별 관심이 없다. 

익숙함의 위력은 컴퓨터 키보드에서 도드라진다. 컴퓨터 키보드는 우리가 다들 쓰고 있는 쿼티 자판보다 드보락자판이 모든 면에서 낫다. 드보락에 익숙해지면 더 빨리 칠 수 있고 손도 덜 피곤하단다. 그러나 사람들은 쿼티만 사용하였고 결국 드보락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쿼티에 익숙하니깐. 여러사람의 우려가 있었음에도 우리나라에서 도로명주소를 도입하자고 밀어부쳤던 사람은 이 익숙함의 위력을 간과했다. 

우리나라는 외국인들의 인권을 생각해 외국인 지문날인을 폐지했지만 자국민들에게는 여전히 지문날인을 받는 나라답게 막대한 예산을 들여 외국인님들의 편의를 위해 도로명주소를 꾸역꾸역 들여왔다. 외국인들은 그럴 것이다. "한국 정부 정말 친절하군요. 그건 그렇고 구글 지도를 켜서 어디를 찾아가려는데 여기서 가까운 와이파이존이 어디있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정부는 도로명주소 정착이 성공적이었다고 그러지만 정말 도로명주소가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면 도로명주소를 홍보하는데 아직 수 천억이나 더 쓰겠다고 발표하고 지자체의 허영심을 이용해 도로명주소 엑스포까지 열려는 생각을 할리가 없다. 무식한 건지 용감한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아직도 우리동네 중국집 사장님은 도로명 주소를 불러주면 화를 낸다. 왜 사장님은 화를 낼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소하기만 해도 짜증이 날텐데 후지고 불편하기까지 하니 화가 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도로명주소 부여방식에 문제는 더 있다. 우리나라는 지도를 보고 지자체 공무원들이 직접 부여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지자체는 이일을 자기 일이 아니라 행정자치부의 일을 대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자체의 특성중에 하나가 눈에 드러나는 일을 하고 일한 티를 유권자들에게 내는데 골몰하는 것인데 지자체 입장에선 도로명주소 부여업무가 티를 내기 어려운 일이고 아무리 잘해봐야 행정자치부 좋은 일만 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자체는 해마다 도로명주소팀을 없애고 해마다 인력을 줄여나가고 있다. 그나마 인력도 신규 9급공무원을 배치한다던가 지적에 문외한인 공무원을 배치하는 건 약과고 어떤 지자체는 공공근로나 공익이 해당업무를 담당하기도 한단다. 길은 점점 복잡해지고 인력의 양과 질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행정자치부는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정책이 잘못될 수도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회사인 구글도 수많은 프로젝트를 수시로 폐기한다. 구글 리더도 없어졌고 구글 플러스도 없어질 위기란다. 그 사람들보다 훨씬 안 똑똑한 우리나라 정치인 공무원들이 자신들이 존재감을 부각시키려고 불쑥 만든 프로젝트가 실패하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패없이 성공만 하는 것이 더 이상하다. 실패하면 프로젝트를 보완하거나 폐기해야지 오로지 홍보부족이라고만 생각해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으로 예산만 쏟아붓는다. 매사에 이런식이니 나라살림이 거덜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