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이
명량 촬영할 때 최민식의 나이는 53세였다. 실제 이순신이 명량전투에 나섰을 때의 나이와 같다.
조선의 武를 대표하는 이순신과 文을 대표하는 세종이 죽은 나이가 모두 54세다.
2. 징비록과 경복궁의 이름은 시경에서 나온 말이다. 탕평은 서경에서 나왔다.
3. 징비록은 일본에 유출되어 인기를 끌었다. 일본판 징비록에서 묘사된 이순신의 모습은 흡사 장비와 비슷한 용모였다.
4. 류성룡은 남산골에 살았는데 그곳은 몰락양반이나 지방에서 올라온 양반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소설 허생전에 등장하는 허생도 남산골에 산다고 묘사되어 있다.
반면 한옥마을로 유명한 북촌은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이었다.
5. 초상
장만장군의 초상화는 진품명품에서 15억원이 나왔다고 한다. 류성룡은 임금이 초상화를 그려준다고 했지만 자신은 죄인이라며 초상화를 남기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만약 남겼었으면 엄청난 가치를 가졌을 것인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왕의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 고종, 순종 이렇게 5명이다. 영조는 체구가 작고 총명한 모습이었는데 과거 드라마 이산에서 나온 이순재의 모습이 가장 어울렸다고. 전주에는 어진박물관이 있다.
6. 한명회는 드라마에 나오는 모습과는 달리 실제로는 체격도 좋고 미남형이었다고 한다. 무예도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7. 안동의 류성룡을 배향한 서원이 병산서원인데 도로가 좋지 않아 먼지 뒤집어 쓰기에 딱 좋다고.
8. 탄금대는 원래 대가야의 우륵이 신라에 투항한 이후 우륵이 공연을 벌이던 장소였다.
1592년 벌어진 탄금대 전투조선군의 주력병인 기마부대가 일본에게 전멸한다. 1575년 일본 전국시대의 나가시노 전투와 양상이 매우 비슷하다.
조선이 일본의 전국시대에 관심을 가지고 주요 전투, 전쟁을 분석했었으면 어땠을까?
9. 평양성 미스터리 : 왜 일본군은 기세를 살려서 진격하지 않고 중간에 멈췄을까?
일본군은 규슈에서 온 병사들로 추위에 익숙지 못하다. 신립의 기마병 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전멸시킨 일본군이었지만 추위에는 장사 없었다. 625전쟁 때도 미군이 우리나라의 추위 때문에 많이 고생을 했다고 한다.
후발부대가 들어와 보급도 하고 부대 체인지가 이뤄져야 하는데 이순신의 활약으로 후발부대가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다.
이들은 도요토미의 직속부대가 아니라 지방영주의 부대로 하청업체 직원들과 같았다. 보급도 끊어지고 엄청난 추위에 시달리는 와중에 더이상 진격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10. 서울 동관왕묘는 관우를 모신 묘로 종로구에 있다.
11. 경상좌수는 부산, 우수는 거제. 전라좌수은 여수, 우수는 해남이다. 이때 좌우는 왕의 시선을 기점으로 둔다.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은 경상우수사인 원균과 소위 나와바리가 겹쳤었다. 그래서 다툼이 많았던 것.